김지대의 시

본문

<유가사>라는 시는 고려시대 문인인 김지대(金之岱)가 유가사에 머물면서 달밤에 차를 마시면서 읊은 것으로 현재 시방루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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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瑜伽寺)


절은 안개 속에 있으니 아무 일 없는데

온 산에는 가을빛 붉게 짙어가네.

구름 사이 절벽길 육칠 리나 되는데

하늘 끝 접한 묏부리 겹치고 또 겹쳤네.

차 한 잔 마시고 보니 처마 끝에 달이 걸렸는데

책 읽고 나니 책상머리에 종소리 울리네.

시내에 흐르는 물 나비를 비웃는데

속세에서 묻은 티끌 씻으려다 마네.


寺在煙霞無事中    사재연하무사중

亂山滴翠秋光濃    난산적취추광농

雲間絶등六七里    운간절등육칠리

天末遙岑千萬重    천말요잠천만중

茶罷松첨掛微月    차파송첨괘미월

講란風榻搖殘鐘    강란풍탑요잔종

溪流應笑玉腰客    계류응소옥요객

欲洗未洗紅塵종    욕세미세홍진종

 김지대(金之岱, 1190년~1266년, 향년77세)


고려 고종과 원종 때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시호는 영헌(英憲), 봉호는 오산군(鰲山君)이다. 청도 김씨의 시조이며, 수원 김씨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출생

1190년(고려 명종(明宗) 20년)에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대안군 김은열의 7세손이자 시중(侍中) 김여흥(金余興)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중룡(仲龍)이었으며 풍채가 훌륭하고 시(詩)와 문장에 뛰어났다고 고려사에 적혀 있다.


그는 문무를 겸한 명신으로 고려의 8대시인이자 다도(茶道)로서도 명성이 있었다고 한다.


청년기

28세 때인 1217년(고종 4)에 거란이 침입하자 태학생(太學生)으로서 군대에 자원하여 원수(元帥) 조충(趙沖)을 따라 강동의 싸움에 참가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군사가 이 호신용의 의미로 방패에 기이한 동물(예: 용, 호랑이, 기린 등)이나 도깨비를 그리는 것이 예사였으나, 그는 “국가의 어려움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자식의 근심할 바이다.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면 충과 효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충효쌍수忠孝雙修〉라는 시를 지어 붙였다.


마침 거란 토벌군 총사령관 조충이 군사를 점검하다 그의 방패를 보고 놀라 비범한 사람이라 여기고 가까이에 두어 중용하였다. 그는 큰 공을 세우고 이듬해 3월에 개선하였다.


1218년(고종 5) 5월 김지대는 문과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여 관직의 길로 나아갔다. 전주사록(全州司錄)으로 있으면서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고 강호(强豪)를 억제함으로써, 호남의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는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을 맡았고 당대의 대학자인 최자(崔滋) 등과 교유하였다.


몽고침략기

그는 몽고침략기 1240년 무렵 진주목사를 지내면서 진주의 촉석루(矗石樓)를 창건하였다.


1243년 전라도안찰사로 임명되었다. 그가 부임할 무렵 전라도 진도에서는 집권자 최우(崔瑀)의 아들 만전(萬全)(무신 집권기 최항(崔沆)의 옛이름)이 그의 수하 통지라는 자와 함께 온갖 악행과 횡포를 부려 백성들의 원성이 무척 자자했다. 신임 안찰사 김지대의 부임으로 만전은 자기 악행의 합법화를 위하여 여러 가지 요구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지대는 가벼운 것만 처리해 주었고 백성에게 해가 가는 일들은 유야무야식으로 넘겨버리는 등 현명하게 대처했다. 이에 만전은 수하 통지를 보내 그의 일들을 재촉하였으나 지대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이에 만전이 직접 김지대의 관소로 찾아가서 부탁하니 이를 승낙하며 수하인 통지를 다시 보내라고 했다. 만전이 또다시 통지를 보내 여러 가지를 요구하자, 김지대는 수하 관병들로 하여금 통지를 결박하여 강물에 던져 버렸다. 후일 만전(최항)이 집권하여 지대가 워낙 청렴하고 근엄하여 감히 해치지를 못하였다.


그해 비서소감(秘書少監,종4품,비서성에 소속된 관직으로 비서감 다음의 고위관직)으로 몽고를 방문하는 사신(使臣)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1247년(고종 34)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를 역임했다. 그 뒤 1255년(고종 42)에는 판사재사(判司宰事)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진사를 뽑았고, 1258년(고종 45)에는 몽고군이 북쪽 변방을 침입하자 조정에서는 당시 군무를 소홀히 하던 북계지병마사 홍희(洪熙)가 여색만 탐하고 군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자, 김지대를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승진시켜 파견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군기를 엄히 세우고 민심을 도닥여서 몽고 군대의 침입으로부터 서북 40여 성을 안전하게 지켜낸다.


은퇴

1260년(원종 1) 음력 12월 정당문학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에 오르고, 1261년 음력 5월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서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平章事)로 치사(致仕)하고 오산군(鰲山君 : 鰲山은 지금의 청도군)에 봉하였다.


1266년(원종 7) 77세로 세상을 떠나니 조정에서 영헌(英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무덤은 현재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에 있다.


평가

김지대에 대한 행장(行狀)은 정인지의 《고려사》, 김종서의 《고려사절요》, 서거정의 《동국통감》 등에 적혀있다. 청백리이며 공명정대하게 정사를 수행했던 재상이다. 고려시대 10대 시인에 꼽히며, 조선 성종 때 대학자인 서거정이 저술한 《동문선》에도 그의 시가 여러 편 실려 있을 정도로 문학사적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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