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스님과 삼국유사

국사(國師)에 오른 고려 때 명승, 뛰어난 문인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1206년 고려 희종 2년에 경상 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세속의 성은 김씨(金氏)이며 이름은 견명(見明), 처음 승려가 되었을 때 회연(然)이라는 이름을 썼으나, 말년에 일연(一然)으로 바꾸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9세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전남 광주의 무량사(無量寺)로 들어갔고, 14세 때 승려가 되기 위해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로 갔다.
22세 때 승과 시험에 합격했고, 44세 때 남해의 정림사(定林寺)의 주지로 초빙되어 6년 동안 머물렀다.
이때부터 왕명에 의해 주요한 불사(佛事)를 주관했다. 다시 남해의 길상암으로 옮겨 가서 54세 때 「중편조동오위」 를 간행했다. 59세 때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영일의 오어사에 머물다가 포산의 인흥사로 옮기면서 선 수행과 불법을 펼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1277년 충렬왕의 명에 의해 청도의 운문사(門寺)로 옮겼는데 이미 72세의 나이였다. 이곳에서 3년을 머물다가 그 당시 경주에 몽진() 와 있던 충렬왕을 모셨고, 국사(國師)로 책봉되었다. 79세 때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나라에서 수리해 준 인각사(麟角寺)로 다시 내려가 그곳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그는 제자에게 북을 치게 하고 자기는 의자에 앉아 다른 승려와 태연하게 선문답을 하다가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84세에 입적했다. 이때 나라에서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包山二聖讚詩(포산이성찬시) 普覺國師一然(보각국사 일연)

相過踏月弄雲泉(상과답월농운천) 우천(그름)에서 달을 밟고 희롱하던
二老風流幾百年(이노풍류기백년) 두신선의 풍류가 몇백년이던가
滿壑烟霞餘古木(만학연하여고목) 안개와 노을이 자욱한 골짝기엔 고목만 우뚝서
低昻寒影尙如仰(저앙한영상여앙) 길게누운 찬그림자 오히려 구름을 우러르는듯.

삼국유사 소개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권과는 별도로 왕력(王歷) · 기이(紀異) · 홍법(興法)·탑상(塔像) · 의해(讀解) · 신주(神R) · 감통感通) 피은(避隱) · 효선(孝善) 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

삼국 역대 왕들의 계통을 도표로 보인 왕력(王曆) , 건국의 시조와 왕들의 사적을 다룬 기이(紀異) 2편이 들어 있다. 왕력편에서는 중국의 역사를 상단에 놓고 그 아래 신라 · 고구려·백제의 왕들을 시대적으로 배치하여 대비시켰다. 기이편은 제2권에까지 이어진다.

고조선 / 위만조선 / 마한 / 두 외부 / 일흔두 나라 / 낙랑국 / 북대방 / 남대방 / 말갈과 발해 / 미서국 / 다섯 가야 북부여 / 동부며 / 고구려 / 변한과 백제 / 진한 / 또 계절 따라 노니는 별장 / 신라 시조 혁거세왕 / 제2대 남해왕 / 제3대 노례왕 / 제4대 탈해왕 / 김알지(탈해왕 대) / 연오랑과 세오녀 / 미추왕과 죽엽군 / 내물왕과 김제상 / 제18대 1 실성왕 / 거문고 갑을 쏘다 / 지철로왕 / 진흥왕 / 도화녀와 비형랑 / 하늘이 내려 준 옥대 / 선덕왕이 미리 만 세 가지 일진덕왕 / 김유신 / 태종 춘추공 / 장춘랑과 파랑


제2권

전반부에서는 건국의 시조와 왕들을 중심으로 삼국과 그 주변 여러 나라의 유래와 역사를 이야기했다. 전반부에서 언급된 나라는 고조선을 비롯하여 위만조선 · 마한·진한·변한 · 대방 · 낙랑 · 가야 · 부여 · 말갈 등 수십 개국에 이르고, 후반부에서는 주로 신라의 역대 왕들이 중심이며, 마지막 부분에서는 후백제와 가락국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첨부했다.

[기이 제2]
문무왕 법민 / 만파식적 / 효소왕 대의 죽지랑 / 성덕왕 / 수로부인 / 효성왕 / 경덕왕, 출담사, 표훈대덕 / 혜공왕 // 원성대왕 / 때 이른 눈 / 홍덕왕과 앵무새 / 신무대왕, 염장, 궁파 / 제4대 경문대왕 / 처용랑과 망해사 / 진성여대왕과 거타지 / 효공왕 / 경명왕 / 경애왕 / 김부대왕 / 남부며, 전백제, 북부 / 무왕 / 후백제와 견훤 / 가락국기


제3권

불교를 전해준 여러 승려들의 사적을 다룬 흥법(興法) , 사찰의 탑이나 불상, 건물 등에 얽힌 일화를 다룬 탑상(塔像) 2편이 실려 있다.

[흥법 제3]
순도가 처음으로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다 / 마라난타가 백제의 불교를 열다. 아도가 신라 불교의 초석을 다지다. 원종 이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이 몸을 마치다 /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 / 보장왕이 노자를 받들고 보덕이 암자를 옮기다.

[탑상 제4]
통경 홀륜사 금당리 10정 / 가섭불의 연좌석 / 요동성의 육왕탑 / 금관성의 파사석탑 / 고구려의 명탑사 / 황룡사의 | 장륙존상 / 황룡사의 9탑 / 황룡사의 종, 분황사의 약사여래불 , 봉덕사의 종 / 영묘사의 장륙존상 /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 / 생의사의 돌미륵 / 홍륜사 벽에 그린 보현보살 / 삼소관음과 중생사 / 백률사 / 민장사 / 앞에서 가져온 사리 미륵선화 미시랑과 진자사 / 남백월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 분황사의 천수대비가 눈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하다. 낙산의 두 성민 관음과 정취. 그리고 조신 / 어산리 부처 그림자 / 오대산의 5만 진신 / 명주 오대산 보질도태자 전기 / 오대산 월정사의 다섯 성중 / 남월산 / 천룡사 / 무장사의 미타전 / 백엄사의 석탑사리 / 영취사 / 유덕사 / 오대산 문수사의 석탑기


제4권

원광 · 자장 · 원효 같은 고승들의 학업과 공적을 실은 의해(義解) 1편이 실려 있다.

[의해 제5]
원광이 서쪽으로 유학 가다 보양과 배나무 / 양지가 지팡이를 부리다 / 천축으로 몰아간 여러 스님 / 혜숙과 혜공미 여러 모습을 나타내다 / 자장이 계율을 정하다. / 원효는 얽매이지 않는다. / 의상이 화엄종을 전하다. / 사복이 말을 못 하다 / 진표가 간자를 전하다 / 관동 풍악의 발연수 비석의 기록 / 승전의 석촉루 / 섬지가 진표조사를 있다. / 유가종의 대현과 화엄종의 법해


제5권

불교적 이적(異)을 다룬 신주(神), 수도승들과 신도들의 정진하는 모습과 덕행을 다룬 감통(感通), 세속을 떠나 은둔하며 덕행을 닦는 승려와 신도들의 생활 및 사상을 이야기한 피은(避隱), 효행의 미담을 전하는 효선(孝善) 등 4편이 실려 있다.

[신주 제6]
밀본법사가 요사한 귀신를 꺾다 / 혜통이 용을 항복시키다 / 명랑의 신민종

[감통 제7]
선도성모가 불교 일을 좋아하다 / 계집종 욱면이 염불하며 극락으로 오르다 / 광덕과 엄장 / 경흥미 성인을 만나다 / 진신석가가 공양을 받 다 / 월명사의 도솔가 / 선률이 살아 돌아오다 /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키다 / 융천사의 혜성가(진평왕 대 / 정수법사가 얼어붙은 여인을 구하다.

[피은 제8]
당지의 구름 타기와 보현보살 나무 / 면회가 이름를 피하다. 문수점 / 혜현이 고요함을 구하다 / 신출이 벼슬을 그만두다. 포산의 거룩한 두 승려 / 영재가 도적을 만나다 / 불계자 / 명여사 / 포천산의 다섯 비구(경덕왕 대) / 염불 스님

[효선 제9]
진정법사의 효도와 선행이 모두 아름답다 / 대성이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하다(신문왕 대 상득 사지가 살를 베어 부모를 공양하다(경덕왕 대) / 손순이 아이를 묻다(흥덕왕 대) / 가난한 딸이 어머니를 봉양하다.


저작 배경

저작과정과 시기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대체로 일연의 나이 70세 1276) 이후에 저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 말한다면 75세(1281) 이후 2, 3년 사이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삼국유사> 가 마지막으로 정리되어 완성된 시기를 말하는 것일 뿐, 이 책의 방대한 내용이 이렇게 짧은 기간 안에 저작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그 이전부터 부분적으로 기록해두 었던 내용을 이때 집중적으로 정리하여 한 권으로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유사(事)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삼국사기>에서 빠뜨린 것을 기워 보완한다는 성격을 가진다. 국가의 대사업으로, - 편찬된 〈삼국사기>는 방대하고도 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역사를 기술하는 태도와 자료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 편찬자의 시각이 지나치게 합리성을 강조하고, 중국 중심적이어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소홀히 다루거나 왜곡하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기존의 역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불교적 측면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다룬 점은 승려인 일연의 입장에서 수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일연이 이를 저작할 당사는 중국을 지배하게 된 몽골의 침략이 계속되어,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慕華思想)이 | 비판되고 민족자주의식이 강하게 대두되던 시기였다. 일연의 저술의도에는 이같은 민족감정이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역사편찬)
따라서 <삼국사기>에서는 가치가 없다고 제외시키거나 소홀히 다룬 자료들에 대해서 주목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결과 . <삼국사기> 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도 있고, 다르게 기술하거나 해석한 부분도 적지 않게 있다. 이런 면에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서로 대조적이면서도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가진다. <삼국사기> 가 합리적이고 공식적인 입장을 취한 정사(正史)라면, <삼국유사>는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입장을 견지한 야사(野史)에 해당한다.


三國遺事5卷-8 避隱에 소개된 包山二聖의 원문과 번역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羅時有觀機/道成二聖師, 不知何許人, 同隱包山. [鄕去(云)所瑟山乃梵音, 此云包也.] 機庵南嶺, 成處北穴, 相去十許里, 披雲嘯月, 每相過從. 成欲 致機, 則山中樹木皆向南而俯, 如相迎者, 機見之而往; 機欲邀成也, 則亦如之, 皆北偃, 成乃至, 如是有年. 成於所居之後高 之上, 常宴坐. 一日自 縫間透身而出, 全身騰空而逝, 莫知所至. 或云: 至壽昌郡[今壽域(城)郡]指(捐)骸焉, 機亦繼踵歸眞. 今以二師名命其墟, 皆有遺趾. 道成 高數丈, 後人置寺穴下.
大(太)平興國七年壬午, 有釋成梵, 始來住寺, 敞萬日彌陀道場, 精懃五十餘年, 屢有殊祥. 時玄風信士二十餘人歲結社, 拾香木納寺. 每入山採香, 劈 析淘洗,  置箔上, 其木至夜放光如燭. 由是郡人項施其香徒, 以得光之歲爲賀, 乃二聖之靈感, 或岳神攸助也. 神名靜聖天王, 嘗於迦葉佛時受佛囑, 有本誓, 待山中一千人出世, 轉受餘報. 今山中嘗記九聖, 遺事則未詳, 曰: 觀機, 道成, 搬師,  師, 道義[有栢岩基.], 子陽, 成梵, 今勿女, 白牛師. 讚 曰: 相過踏月弄雲泉, 二老風流幾百年. 滿壑烟霞餘古木, 偃昻寒影尙如迎.
搬音般, 鄕云雨木,  堞音牒, 鄕云加乙木. 此二師久隱 叢, 不交人世, 皆編木葉爲衣, 以度寒暑, 掩濕遮羞而已, 因以爲號. 嘗聞楓岳, 亦有斯名, 乃 知古之隱倫之士, 例多逸韻如此, 但難爲蹈襲. 子(予)嘗寓包山, 有記二師之遺美, 今幷錄之. 紫茅黃精 皮, 蔽衣木葉非蠶機. 寒松  石  , 日暮林下樵蘇歸. 夜深披向月明坐, 一半颯颯隨風飛. 敗蒲橫臥於 眠, 夢魂不到紅塵羈. 雲遊逝兮二庵墟, 山鹿恣登人迹稀.


포산이성(包山二聖)

신라 때에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사(聖師)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함께 포산(包山; 나라 사람들이 소슬산所瑟山이라 함은 범음梵音이니 이는 포包를 이름이다)에 숨어 살았는데,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지었고, 도성은 북쪽 굴에 살았다. 서로 10여 리쯤 떨어 졌으나,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항상 서로 왕래했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자 하면 산 속의 수목이 모두 남쪽을 향해서 굽혀 서로 영접하는 것 같으므로 관기는 이것을 보고 도성(道成)에게로 갔다. 또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고자 하면 역시 이와 반대로 나무가 모두 북쪽으로 구부러지므 로 도성도 관기에게로 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를 지났다. 도성은 그가 살고 있는 뒷산 높은 바위 위에 늘 좌선(坐禪)하고 있었는 데, 어느 날 바위 사이로 몸을 빼쳐 나와서는 온몸을 허공에 날리면서 떠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혹 수창군(壽昌郡; 지금의 수성군壽城 郡)에 가서 죽었다는 말도 있다. 관기도 또한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 두 성사(聖師)의 이름으로써 그 터를 명명(命名)했는데 모두 유지(遺址)가 있다. 도성암(道成암)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후인들이 그 굴 아래에 절을 지었다.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 임오(壬午)에 중 성범이 처음으로 이 절에 와서 살았다. 만일미타도랑(萬日彌陀道場)을 열어 50여 년을 부지런히 힘썼는 데 여러 번 특이한 상서(祥瑞)가 있었다. 이때 현풍(玄風)의 신도 20여 명이 해마다 결사(結社)하여 향나무를 주워 절에 바쳤는데, 언제나 산에 들 어가 향나무를 채취해서 쪼개어 씻어서 발[箔] 위에 펼쳐 두면 그 향나무가 밤에 촛불처럼 빛을 발하였다. 이로부터 고을 사람이 그 향나무에게 보시(布施)하고 빛을 얻은 해라 하여 하례하였다. 이는 두 성사의 영감(靈感)이요 혹은 산신(山神)의 도움이었다. 산신의 이름은 정성천왕(靜聖 天王)으로 일찍이 가섭불(迦葉佛) 때에 부처님의 부탁을 받았으니 그 본서(本誓)에 말하기를, 산중에서 1,000명의 출세(出世)를 기다려 남은 과 보(果報)를 받겠다고 했다.
지금 산중에 9성(聖)의 유사(遺事)를 기록한 것이 있는데 자세하지는 않으나 9성(聖)은 관기(觀機)ㆍ도성(道成)ㆍ반사(반師)ㆍ첩사(첩師)ㆍ도의 (道義; 백암사栢岩寺 터가 있음)ㆍ자양(子陽)ㆍ성범(成梵)ㆍ금물녀(今勿女)ㆍ백우사(白牛師) 들이다.
찬(讚)해 말한다.

相過踏月弄雲泉 서로 지나가다 달빛을 밟고 구름과 내를 희롱하던.
二老風流幾百年 두 노인의 풍류(風流) 몇 백 년이 지났는고.
滿壑烟霞餘古木 연하(烟霞) 가득한 구령엔 고목(古木)만이 남았는데.
偃昻寒影尙如迎. 어긋버긋 찬 그림자 서로 맞는 모양 일레.

반(搬)은 음이 반(般)인데 우리말로는 피나무라 하고, 첩은 음이 첩(牒)인데 우리말로는 갈나무(떡갈나무)라 한다.
이 두 성사(聖師)는 오랫동안 산골에 숨어 지내면서 인간 세상과 사귀지 않고 모두 나뭇잎을 엮어 옷으로 입고 추위와 더위를 겪었으며 습기를 막 고 하체를 가릴 뿐이었다. 그래서 반사(반師)ㆍ첩사(첩師)로 호를 삼았던 것인데, 일찍이 들으니 풍악(風岳)에도 이런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이 로써 옛 은자(隱者)들의 운치가 이와 같은 것이 많았음을 알겠으나 다만 답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일찍이 포산(包山)에 살 때에 두 스님이 남긴 미덕(美德)을 쓴 것이 있기에 이제 여기 아울러 기록한다.

자모(紫茅)와 황정(黃精)으로 배를 채웠고, 입은 옷은 나뭇잎, 누에 치고 베 짠 것 아닐세.
찬바람 쏴 쏴 불고 돌은 험한데, 해 저문 숲속으로 나무 해 돌아오네.
밤 깊고 달 밝은데 그 아래 앉았으면, 반신(半身)은 시원히 바람 따라 나는 듯.
떨어진 포단(蒲團)에 가로 누워 잠이 들면 꿈속에도 속세에는 가지 않노라. 운유(雲遊)는 가 버리고 두 암자만 묵었는데, 산사슴만 뛰 놀뿐 인적은 드물도다.


일연이 포산으로 들어온 것은 1227년, 그의 나이 22세로 승과에 급제하고 난 후 포산의 보당암에 정착하면서 부터였다.

일연은 가지산문에 속한 선승이었는데 가지산문이란 통일신라시대에 전남 장흥군 가지산 보림사(寶林寺:迦智寺)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선종(禪宗) 9산문(山門)의 한 종파이다. 그러나 포산은 가지산문과는 상관없는 밀교적 경향이 두드러진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일연이 비슬산(포산)에 들어와 수행을 한 것은 아무래도 그의 고향인 경산과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라는게 지배적인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연은 그의 어머니가 96세로 돌아가실 때 까지 봉양했다. 일연이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고 난 다음 군위 인각사를 하산소로 삼아 내려간 이유도 노모를 봉양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에서 어쩌면 쉽게 유추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려 이후의 승려들은 출가를 하면, 속세와 인연을 끊지만, 고려시대의 승려들에게는 출가한 승려들이 세속의 부모를 만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일연 말고도 고려말기의 승려 보우도 노모를 모시고 수행했다고 『삼국유사』 「효선」 편에 실려있다.

포산의 불교적 성향은 포산이성조 뒷 부분(다음 본문의 중략된부분)의 내용을 보면 색채가 드러나는데,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성종 원년, 982) 임오壬午에 중 성범이 처음으로 이 절에 와서 살았다. 만일미타도랑萬日彌陀道場을 열어 50여 년을 부지런히 힘썼는데 여러 번 특이한 상서祥瑞가 있었다. 이때 현풍玄風의 신도 20여 명이 해마다 결사結社하여 향나무를 주워 절에 바쳤는데, 언제나 산에 들어가 향나무를 채취해서 쪼개어 씻어서 발箔위에 펼쳐 두면 그 향나무가 밤에 촛불처럼 빛을 발하였다. 이로부터 고을 사람이 그 향나무에게 보시(布施)하고 빛을 얻은 해라 하여 하례하였다. 이는 두 성사의 영감(靈感)이요 혹은 산신(山神)의 도움이었다. 산신의 이름은 정성천왕(靜聖 天王)으로 일찍이 가섭불(迦葉佛) 때에 부처님의 부탁을 받았으니 그 본서(本誓)에 말하기를, 산중에서 1,000명의 출세(出世)를 기다려 남은 과 보(果報)를 받겠다고 했다. 지금 산중에 9성(聖)의 유사(遺事)를 기록한 것이 있는데 자세하지는 않으나 9성(聖)은 관기(觀機)ㆍ도성(道成)ㆍ반사(반師)ㆍ첩사(첩師)ㆍ도의 (道義; 백암사栢岩寺 터가 있음)ㆍ자양(子陽)ㆍ성범(成梵)ㆍ금물녀(今勿女)ㆍ백우사(白牛師) 들이다.

포산은 신라시대 관기와 도성 이성이 수도처로 삼고, 아미타신앙을 수련했으며, 고려시대 이르러 도성이 수도했던 자리에 절이 세 워졌으며, 그 절을 중심으로 미타신앙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성종 원년인 982년에는 후일에 아홉 성인의 하나로 추앙되는 성범이 만일 미타도량을 열어 정근하였으며, 현풍지역의 불자를 중심으로 신앙결사가 성립되었다. 이 신앙결사인 향도란 미타신앙 을 통해 정토왕생을 기원하는 열렬한 신자들의 자발적인 조직이며, 이 결사는 군내 사람들의 존경과 지원을 받았던 사실에서 포산 지역이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일연의 나이 31세인 1236년, 고려와 몽고와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전쟁의 불길은 포산에도 미치게 되었다. 이때 일연은 포산을 떠나 파신을 하려고 하는 동시에 문수오자주文殊五字呪를 외우면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 대한 예불禮佛을 지성至誠으로 하였다. 포산은 밀교적인 경향이 두드러진 지역이었다. 일연은 가지산문에 속한 선승이지만 밀교적 색채가 강한 포산의 신앙에 어느 정도 경도 되었던 것이다. 곳곳에서 몽고의 침입으로 인한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그는 승려로서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를 고민하 였지만 일연은 적극적으로 산성에 들어가서 적과 싸우기보다 문수보살에 기도하면서 피난처를 구하였다. 당시 승려들의 활동을 보면 김윤후와 같이 직접 몽고군과 전투를 하면서 몽고군의 침략을 저지한 경우가 많다. 상주에서는 황령사黃岺寺의 승려들이 상주산성에 들어가 농성을 하면서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하기도 했다. 일연은 대몽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종교적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일연이 적극적으로 기도를 하던 어느 날 문수보살이 벽 사이에서 홀연히 나타나 무주無住로 가라는 계시를 하였으나, 일연은 그 뜻을 알지 못했다. 다음해가 되어서야 묘문암 북쪽에 무주암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무주암으로 옮겨 계속 수양했다. 무주암 또한 포산 안에 있었다.

일연은 무주암에서 고종 24년(1237)에 오도悟道에 이르렀다. 당시 일연은 '생계는 없어지지 아니하고, 불계는 늘지 않는다. (生界不滅 佛界不增)라는 화두를 참구參究하였다고 그의 비문碑文에 기록되어 있다. 일연은 오도의 느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오늘에야 비로소 삼계三界가 한바탕 환몽과 같다는 것을 알았으며, 대지大地에는 가는 티끌만큼의 장애도 없다(障) 는 것을 알았다” 라고 하였다.
무주암에서의 활연대오豁然大悟는 일연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주었다. 이 해에 일연은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승계를 받고 계속 정진하였다. 쉽게 말하면 일연은 포산에서 종교적 신앙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득도得道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일연이 포산에서는 종교적 수도에 매진했다면, 그 이후는 본격적으로 불교계에 중심자로 떠오르게 된다. 즉, 포산에 있을 때 삼중 대사의 승계를 받았고, 1246년 선사禪師로 승진했다. 그런 뒤에 1249년에 장안의 초청으로 정림사로 옮겨갔고, 그후 1261년 강화 도를 거쳐, 원종의 부름으로 불타사, 선월사 등에 머무르기도 했다. 그 당시에 이장용, 유경 등 문신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이들의 추천으로 일연은 선월사의 주지가 되어 불교계의 중심인물로 부각되었다. 그러면서 1259년 승려로서는 최고의 승계인 대선사大禪師로 승진하였다. 1264년 가을에 포항 오어사로 내려왔다.
1264년에 일연은 인흥사의 주법主法 만회萬烣가 다시금 포산으로 돌아올 것을 청하자 그 제의를 받아들여 포산으로 돌아와 학승들을 지도하였다. 이때에 일연으로부터 수업을 받고자 하는 승려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1277년, 왕명으로 운문사로 옮길 때 까지 13년 동안 일연은 인홍사에서 주석하게 된다.
포산은 일연이 23년간 수도를 하고 득도를 한 곳이다. 포산에서 머문 시기를 기준으로 일연을 살펴보면 양상을 보인다. 포산에 있을 때, 그는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종교수양에만 몰두 하였다면, 포산에서의 생활이후 그는 삼중대사의 품계를 받는 등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연이 수행했다는 보당암과 무주암은 지금 그 위치조차 알 수 없고, 인흥사는 이미 흔적도 없이 남평문씨들의 세거지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포산은 고대 불교신앙의 중심지였던 만큼 수많은 사찰들과 암자들이 남아있고, 「삼국유사」 「피은」편에 포산이성조에서 일연이 도성과 관기에 대한 서술에서 도성암과 관기봉의 지명이 아직까지 내려오고 있어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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